나라(奈良):사슴공원 Travel.旅游


  아침, 밤 늦게 들어온 젊은 회사원이 옷을 입는 소리가 부스럭부스럭 들려옵니다. 핸드폰을 보니 새벽 5시 40분이 약간 넘은 시각. 새벽잠이 깨었으니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출장와서 게스트하우스의 불편한 잠을 잔 그 친구가 오히려 딱하더군요. 게다가 나는 지금부터 또 놀러 갈 거고, 그 사람은 출근을 회사를 가야지 않겠습니까. 파이팅, 이름 모를 직장인이여. 나는 지금부터 커피도 마시고 샤워도 하고 사슴보러 갈 거다.

 서기 710년에 세워진 고대 일본의 수도, 교토(古都)로 이사하기 전까지, 나라(奈良)는 80여 년간 일본의 중심이었다고 당의 문화를 수용하여 시가지가 바둑판 모양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신라보다는 발해와 친했다는 것 등등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이 가득하지만, 오늘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사슴 때문 입니다. 이 곳은 사슴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많이. 그것도 우리도 없이 말이죠. 

 긴테츠 나라역으로 나온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차도와 건물들. 어디를 봐도 사슴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약간 당황했지만 여행자의 직감이라고 할까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우리도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들 가는 곳으로 가면 크게 손해 보지는 않더군요. 비록 원했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볼 경우도 있지만 말이죠.

 사람들을 따라 낮은 경사를 오르니 주변의 건물들이 낮아지기 시작하고 길 양옆으로 기습적으로 숲이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차도와 인도 사이에 설치된 울타리가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홀연히 사슴들이 보였습니다. 이야...

 갑작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소개하는 사람도 없이 오직 사슴만 당당했습니다. 그 옆 차도에는 여전히 차가 다니고 건물들이 서 있고 인도로 사람들이 다니고 있는데 사슴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초현실적인 광경이더군요. 작고 검은 눈. 가늘고 죽 뻗은 다리. 작은 머리와 부드러워 보이는 털. 타닥타닥 인도를 걸어 다니는 모습은 귀엽고 신기했습니다. 생(生)사슴이었습니다. 날 사슴이었습니다. 무엇이든 신선한 것이 좋지요.

 하지만 길 한켠의 경고판에는 사슴의 행동을 간략하게 묘사하는 4가지 행동 쓰여 있었는데,. '...문다, 때린다, 들이 받는다, 돌진...' 눈을 의심할 만한 설명을 낄낄거리면서 읽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내 앞으로 지나가던 한 아이가 사슴에게 집적거리다가 옆구리를 걷어차이고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사슴들의 뿔은 모두 잘려 있었는데, 관람객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나 봅디다. 아이와 아이의 일행은 공원 관리하는 사람을 고소한다고 꽥꽥거리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는 듯 웃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일 크게 웃은 건 옆에서 지켜보던 저였던 것 같군요.

 사슴에게 쫓기고 싶거나 걷어차이고 싶어 하는 별종을 위해 공원 곳곳에서 '사슴센베이'를 150엔에 팔고 있었습니다. 사슴들은 가게 주변을 기웃거리다 이 센베이를 사는 사람이 있으면 삽시간에 포위, 센베이를 줄 때까지 쫓아다니거나 주머니를 물어뜯더군요. 종이봉투 같은 것을 들고 있으면 가방을 뜯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아예 센베이 가게를 터는 것이 더 좋지 않을 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노점에 진열된 센베이에 주둥이를 내밀던 사슴이 주인장에게 귀퉁이를 얻어맞고 황급히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말 인정사정없이 귀싸대기를 날리던 주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센베이 판매를 재개하더군요. 나라에 불교를 전파한 신이 사슴을 타고 내려왔기에 이 지방 사람들은 사슴을 귀하게 여긴다고 들었는데, 방금 그 광경은 무엇일까요. 이 곳은 정말 너무도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곳이었습니다.


 식욕에 충실한 나머지 폭력까지 행사하는 사슴에 배신감을 느낀 아내는 그 감정을 위와 같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냈습니다. 하지만 사슴이 온순하고 부드럽고 귀여울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멋대로 생각한 것이지 사슴은 그렇게 주장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진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걷어 차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나라에 사슴만 있는 것은 아니죠.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인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전이 그렇습니다.
대불전 앞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저 청동 등만 해도 천년이 넘은 국보인데, 관람객 대부분이 눈길한번 주지 않더이다. 홀대받는 것이 딱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나는 바짝 붙어 구경 할 수 있었으니 좋았지요. 그 외에도 삼면 아수라 상이니 천수 관음상이니 이곳에서 번성했던 불교문화가 빚어낸 걸출한 문화재들이 도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절들의 낡아 빠진 기둥이었습니다. 세월을 먹어 색이 바래지다 못해 검은색으로 삭아 들어가는 기둥들. 낡고 소박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세월을 묵힐 그 낡은 기둥들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천년고찰은 한국에도 중국에도 있습니다만, 언젠가는 LED 램프에 휘감기거나 쓸데없이 윤이 나고 색이 진한 페인트 범벅이 되버리겠지요. 

 도다이지에서 나오는 길, 난다이몬(南大門)의 큰 기둥을 만져보니 따뜻했습니다. 꺼칠꺼칠한 표면에는 바람과 구름과 낮과 밤이 스며들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플라스틱은 시간이 흐르면 색이 바래고 강철은 녹이 쓸기에 도시는 태생적으로 세월이 갈수록 흉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연에 겸손했던 옛사람들의 건물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오사카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경황없는 도시에서 또 먹을걸 찾아 헤매는 것보다 나라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로 한 우리는 역 옆의 상점가에서 본 감잎 고등어 초밥집으로 갔습니다. 손님 대부분은 포장된 초밥세트를 선물용으로 사는 듯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매장 안쪽에는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나와 아내는 고등어 초밥 외에 장어 초밥과 김말이 초밥이 같이 들어 있는 초밥 세트를 시켜서 먹어보았습니다.

 초밥은 맛있었으나, 내 입맛에는 조금 비리더군요. 감잎이 고등어의 비린 맛을 잘 잡아 주었으나 저는 아직 어린가 봅니다. 바다 내음을 좋아하는 아내는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김밥과 비슷하게 생긴 김말이 초밥이 너무 맛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 삼을 것이 있나 상점가를 둘러보았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념품 가게와 옷 가게를 지나 반대편으로 나오니 모찌가게에서 한참 떡을 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절구에 떡 반죽을 모으고 다른 사람이 그 절구를 떡메로 치면서 뭐라 알 수 없는 구령을 신나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늘끝까지 올라갈 듯 떡메가 파란 하늘을 찌르고, 그 광경을 보는 나는 치는 내내 떡메가 사람 손을 찧을까 조마조마했었습니다. 절대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말이죠. 

 이윽고 떡 치기가 끝나자 사람들이 가게에 줄을 섰고 떡장사는 고명을 넣거나 콩가루를 묻힌 갓 뽑은 떡을 신나게 팔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슬몃 줄 사이에 서서 하나 사 먹어 봤는데 한 손으로 제대로 들 수도 없을 정도로 떡이 부드러웠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맛있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반년 전의 늦가을 밤에도, 그리고 그 글을 다시 고쳐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찹쌀떡의 맛을 상상하면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덧글

  • 8비트소년 2017/03/20 17:32 # 삭제 답글

    저도 토요일에 그 떡 사먹었는데 맛있더라고요.
  • Oldchef 2017/03/21 13:55 #

    아...부럽네요...저도 다시 먹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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