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Cuba),1일차:Havana,쿠바 혁명가 열전_1부 - 쿠바(Cuba)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쿠바는 내 여행 버킷 리스트에서 언제나 상위권에 있던 국가였다. 

아름다운 카리브의 해안이 있고 바카디럼과 향기로운 시가 - 비록 피우지는 못하지만 - 가 넘치는 나라.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대표되는 그들 특유의 음악이 넘치고, 위대한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그 곳, 쿠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매력적인 요소가 쿠바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삼국지에 필적하는 드라마틱한 혁명기(記)가 이곳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1895년의 쿠바 독립전쟁부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까지, 쿠바 사람들은 스페인제국과, 독재정권과, 그리고 미국에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혁명해 왔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미국의 엠바고로 온 나라가 고립되었어도 이 유쾌한 사람들은 열심히 야구를 하고 삼바 춤을 추면서 즐겁고 당당하게 '독립'적으로 - 자의였든  타의였든 - 생존해 낸 것이다. 어떻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흘러간 지금 과연 그들은 행복할까? 자랑스러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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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까페톨리오의 정 반대편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니 지나치게 넓은 4차선 회전 교차로(?)가 나왔다. 회전 교차로의 왼편으로는 베다도(Vedado)방면까지 이어지는 하바나의 랜드마크, 말레콘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오른편에는 식민시대 양식의 요새가 보였다. 그쪽으로 더 나아가면 아바나 비에자(Habana Vieja), 일명 올드 하바나(Old Havana)에 도달하겠지. 그럼 회전 교차로의 정면 너머에는 무엇이 있나. 멀리서 바라본 그곳에는 멋드러진 동상 하나가 서 있었다. 누구의 동상인지 궁금했던 나는 아내를 독려해서 넓은 정원과 더 넓은 4차선을 건너 그 근처로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곳으로 가는 길은 녹녹하지 않았다.

도로에는 신호등이 없었고 운전자들에게는 운전매너가 없었다. 낡고 닳은 좀비같은 자동차들은 검은 매연을 드래곤 브레스 마냥 뿜어 대면서 맹렬히 교차로를 회전하고 있었고 그 4차선의 너비는 이스라엘 민족이 지나야만 했던 홍해 마냥 광활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홍해를 가를 모세가 없었다. 짧게나마 중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던 나는 이런 유쾌한 인간들을 어떻게 무시하고 건너야 할지 대략 감이 섰지만 아내는 '길 건너 친구들'의 캐릭터 마냥 차에 치이지 않을까 무서워하고 있었다. 어찌어찌 그 손을 부여잡고 길을 건너기는 했으나 그 와중에 아내는 인도에 난 틈에 신발이 끼어 발가락을 다치고 말았다. 나는 급히 주변에 있던 벤치로 아내를 데리고 갔다.

언뜻 피가 비치는 그녀의 발가락을 보니 미안한 마음과 쿠바에 대한 짜증이 솟아 올랐다. 매연도 그렇고 슬슬 더워지는 -12월인데 - 날씨도 그렇고 그렇게 큰 틈을 메우지 않은 공무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날 따라 휴대용 밴드를 챙기지 않은 나도 미웠고, 동시에 등산화를 신지 않고 샌달을 신은 아내 - 돌이켜보면 열대기후에 등산화를 신는 내가 이상한거다. - 도 원망스러워 졌었다. 여기서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신발을 신고 온 거에요?' 라고 한 마디 하면 그 이후의 여행 전체 일정은 단테의 신곡 마냥 지옥 관람으로 돌변했겠지. 

나이 먹으면서 갖추어야 하는 소양 중 하나는 바로 머리의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내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무렴.

일단 가지고 있던 일회용 휴지에 물을 적셔 아내의 상처를 싸매고 잠깐 고민을 했다. 숙소에 갔다 올까? 하긴 거리가 멀지 않으니 그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들고 있던 가방을 아내에게 맡기고 잠깐 앉아 있으라고 하고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했던 찰나에...우리가 앉아있던 벤치 반대편 끝에 앉아 계시던 후덕해 보이는 중년 아주머니가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다가갔더니 그 아주머니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밴드 하나를 내밀더라. 아...그 순간 매연과 더위로 인한 디버프는 몽땅 사라지고 하바나에 대한 나의 인상은 급 상승했다. Thank you라고 인사를 했더니 아내가 Gracias라고 하라고 고쳐준다. 그 친절한 아주머니는 우리의 인사에 또 다시 미소로 답하고, 주섬주섬 핸드백을 챙겨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고마운 분이지.

여행자의 수호 성인 크리스토포로(Christophoro)같으신 그 분의 휴대용 밴드의 힘으로 나와 아내는 마침내 망할 회전 교차로를 건너 그 동상 앞에 마주할 수 있었다. 힘겹게 마주한 동상의 정체는 바로...



1. '마체테 돌격'의 막시모 고메즈(Maximo Gomez)

10꾹 지폐에서도 찾을 수 있는 - 외국인이 사용하는 꾹(CUC)에는 건물과 동상이, 현지인이 사용하는 꿉(CUP)에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 이 동상의 주인공은 바로 막시모 고메즈(Maximo Gomez)장군이 되겠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스페인의 기병대 장교로 임관했던 막시모는 아이티 혁명 이후 쿠바로 넘어와 정착한 이주민이다. 그의 국적과 스페인 군 경력에도 불구하고 막시모는 1868년에 발생한 쿠바 십년 전쟁(Cuba's Ten Year's War)에서 혁명군에 가담, 주요 지휘관으로 혁혁한 공적을 세운다. 특히, 쿠바의 정글 지형과 부족한 혁명군의 무장 및 훈련 상태를 십분 고려하여 그가 생각해낸 소위 '마체테 돌격(Machete Charge)'은 잘 훈련된 스페인의 기병대를 상대함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사탕수수 재배에 사용되던 농기구인 마체테는 노예 출신의 혁명군에게는 아~주 익숙한 도구였으며 그 살상력은...굳이 이야기 할 필요가 없겠지.

10년 전쟁의 결과 '혁명에 가담했던 흑인 노예'들은 해방되고 세금을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개선이 있었으나 결국 쿠바는 독립하지 못했다. 독립을 쟁취하기에는 스페인에게 있어 쿠바는 너무나 중요한 식민지였으며, 혁명군의 지도자 카를로스 마뉴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espedes)가 전쟁 통에 전사한 이후 혁명군은 작은 게릴라 조직으로 지리멸렬, 때로는 서로 반목하는 바람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지. 막시모 고메즈도 흑인장군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ceo)와 투닥투닥. 그래가지고서야 독립할 수 있겠어?

그래도 쿠바 독립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0년 전쟁에서의 활약상과 이후 꾸준히 민중의 편에서 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막시모는 공산혁명 전의 독재정권에서도, 공산혁명 이후의 사회주의 정권에서도 꾸준히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커다랗게 만든 그의 동상이 오랜 세월 부서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겠지. 다만 쪼개진 채로 내버려둔 바닥돌이나 시멘트로 대충 때워 놓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기둥에서 미루어 볼 때, 위대한 카스트로 동지 만큼 존경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막시모 고메즈 동상을 기준으로 약간 남동쪽을 향해서,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걸어갔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저주 받을 회전 교차로를 다시 건너 오른쪽에 스페인 대사관을 다 지날 즈음, 우리는 또 다른 쿠바 혁명가의 동상을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군가 하니 바로 그 유명한 호세 마르티(Jose Marti)가 되겠다.



2. 관타나메라(Guantanamera)의 호세 마르티(Jose Marti)

10년 전쟁 이후 진행된 정치, 사회 제도의 개혁 - 노예제 폐지와 세금 감면 등 - 으로 쿠바인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는 했지만 많은 피 끓는 정치가들, 사상가들은 쿠바의 완전한 독립을 원했다. 특히, 급직전인 사상으로 체포, 10년 전쟁 내내 강제노역소에서 빡세게 굴러야 했던 시인이자 사상가인 호세 마르티(Jose Marti)는 그 누구보다도 '스페인 놈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니 스페인 정부가 그를 가만 둘리가 있겠는가. 마르티는 10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쿠바에서 추방 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100년 정도 먼저 태어난 피델 카스트로' 같은 이 무모한 친구는 추방 당한 뒤에도 얌전히 있지 않고 미국과 온 남미를 돌아다니면서 쿠바 독립 및 혁명의 필요성을 여기저기 다 전파하고 다녔다. 그리고 각지로 추방된 쿠바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는데 온 정열을 쏟았지. 그 결과 그는 거의 대부분의 남미 국가에게 '공공의 적'으로 찍혔지만 쿠바 독립의 주춧돌이 되는 사상과 이론을 정리, 제시할 수 있었다. 서로 으르렁대었던 막시모와 마세오를 연합하게 만든 것도 바로 호세 마르티. 그야말로 '우리의 선생님(El Maestro)'이란 별명이 어울리는,당시 쿠바 국민에게 있어 중국의 쑨원(孙文)과 같은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었다.

그의 노력과 스페인 제국의 쇠퇴로 바야흐르 또 다른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남미 각지에서 무기, 병력, 자금이 비밀리에 쿠바로 유입되었고 호세 마르티도 여러 군사 지휘관들과 함께 1895년 4월11일 쿠바 동쪽에 상륙, 혁명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에 가득 찬 시인 이었던 그는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전쟁 영웅들을 지휘하여 혁명전쟁을 이끌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깨달았던 것 같다. 1895년 5월 19일, 제2차 쿠바독립전쟁의 첫 번째 전장이었던 도스 리오스(Dos Rios)에서 그는 확연히 눈에 잘 띄는 새하얀 말(!)을 타고 곧바로 스페인 군의 전선으로 돌격, 가슴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의 전사와 관련하여, 많은 역사가들은 그 돌격을 그가 가장 바라 마지않던 방식의 자살로 생각하고 있고, 나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렇게 동상 앞에서 서서 그의 일생을 곰 씹고 있으려니 머리로는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심장은 멋대로 뛰더군. 허허.

아이러니한 것은, 혁명에 일생을 바친 그의 유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의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한 곡의 노래라는 점이다. 1929년, 호세 페르디난드 디아즈(Jose Fernandez Diaz)라는 쿠바의 라디오 가수가 마르티의 시 중 한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노래를 만들었으니 그 불후의 명곡이 바로 '관타나메라(Guantanamera)'이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하바나, 아니 쿠바 전역의 밤 거리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이 노래를 모르는 쿠바 관광객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노래가 수많은 동상으로 세워지고 국제 공항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기린아의 시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과연 저 세상에 간 마르티는 혁명으로 이루어낸 쿠바가 마음에 들었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자신의 작품이 더 좋았을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과 관타나메라를 흥얼거리면서, 나는 아내와 함께 마르티 동상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양식의 건물로 다가갔다.

이 화려한 양식의 건물은 쿠바의 좋은 시절에 세워진 대통령궁이었다. 2대 대통령인 마리오 그라시오 메노칼에서부터 마지막 대통령인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까지 이 건물은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었으나 공산 정권하에서 대통령궁은 필요가 없지? 곧바로 이 건물은 혁명박물관(Museo de la Revolución)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건물은 우리에게 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 준 것이지. 8 CUC의 입장료도 적당하니 첫번째 체크포인트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 우리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표를 사며 물어보니 보안을 위해 가방을 맡겨야 하지만 사진은 맘껏 찍어도 된다고 했다. 건물은 4층으로 이루어진, 가운데가 텅빈 구조였었고 중앙에 있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면 그 층부터는 건물의 양쪽 끝의 계단으로 3,4층으로 갈 수 있는 구조였다.


그래도 한 나라의 수장이 머물렀던 곳이기에 건축 양식과 구조가 웅장하고 화려했으나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곳곳의 총탄 자국은 '혁명적인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함이라고 쳐도 화장실에 휴지 하나, 비누 한 장 없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전시물도 전반적으로 관리가 잘 되고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혁명을 하나의 종교라고 가정할 때, 성유물에 해당하는 전시물들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 예를 들어 체 게바라의 사형 후, 그의 시신을 담아온 더플백 같은 - 그 사료들을 보관, 전시 할 수 있는 부스조차 변변치 않았다. 디자인이나 관객 동선 등에 대한 배려는 말할 것도 없지. 아무리 잘 봐줘도 박물관으로서 이곳의 점수는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은 실망과 함께 박물관을 돌아보는 도중 눈에 들어오는 풍자화가 있었으니 바로 쿠바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를 그린 그림이었다.



3. 인민의 아들(?),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호세 마르티의 열정적인 죽음에 감화된 쿠바인들이 혁명군에 속속 가담하면서 혁명군은 전쟁 초기, 거침없이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미의 마지막 보루였던 쿠바가 너무나 절실했던 스페인의 저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 와중에 혁명군 부사령관 마세오가 전장에서 전사하면서 2차 쿠바독립전쟁도 지루한 소모전으로 돌변했다. 이 아비규환을 근심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던 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바다 건너에 있던 미국. 자기 앞마당에서 자국의 이익에 반(反)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싫어한 미국은 군함 메인호(USS Maine)가 하바나에서 침몰한 것을 이유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 이른바 미서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에서 스페인은 패배, 결국 쿠바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고 쿠바는 명목상으로 독립을 이룬다.

하지만 쿠바의 독립은 어디 까지나 표면적. 미국은 그 이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쿠바에 행사한다. 선거로 당선되는 대통령들도 당연히 친미(親美). 그들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뭐, 그렇게 해도 경기가 좋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쿠바의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은 미국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이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설탕무의 생산국이었던 독일과 러시아의 설탕 생산이 크게 감소하면서 1900년대 초의 쿠바 경제는 정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다. 해피해피 모두 해피.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과 러시아의 설탕 생산량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자바 등 동남아시아에서도 설탕이 생산되면서 설탕에 종속되어 있던 쿠바 경제는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다. 어려운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쿠바 사람들이 이런저런 정책을 펴려고 하면 '큰 형님' 미국이 개입했다. 군대를 보내 미국이 투자한 사탕수수 농장주를 보호하고, 생계를 위해 시위하는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갈등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그러던 차에 1925년, 게라도 마차도(Gerado Machado)가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설탕과 미국에 종속되어 있던 쿠바를 확 바꾸겠습니다!'를 외치던 그는 설탕의 생산량을 제한했고 설탕가 폭락으로 발생한 대량의 실업을 고속도로, 수도, 학교 및 주요 랜드마크 - 오전에 봤던 엘까피톨리오(El Capitolio)도 마차도 정권 때 지어졌다 - 건설 등 대규모의 토목사업으로 해결해 내었다. 경제는 이내 회복되었다. 이 시절 쿠바는 아메리카에 있던 그 어떤 나라보다 잘 발달된 전화 네트워크와 라디오 방송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고, 현재 하바나에서 볼만하다고 할만한 건물들은 죄다 그때 지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성공은 막대한 정부 예산의 투입 - 빚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 빚은 대부분 미국의 은행에서 온 것이었다. 결국 그 또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닥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에 빚으로 올린 쿠바의 경제는 삽시간에 무너졌고, 사정이 급한 미국의 은행들은 빚을 갚으라고 마차도를 압박했다. 그는 정부 예산을 줄여 빚을 갚으려 시도했고 그 와중에 공무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직업을 잃었다. 수많은 실업자들은 참다 못해 거리로 나섰고, 마차도의 퇴진을 요구했다.

여기서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그가 물러나면 좋게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인데 마차도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유럽의 히틀러에게 신경이 곤두서 있던 미국은 쿠바의 사정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그 틈을 타 마차도는 점점 독재자로 변해갔다. 이에 하바나 대학들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몇몇 학생들이 시위 중에 죽었고 그에 분노한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어찌 이리도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는지.

1933년, 시위대를 진압하던 군인들 중 일부가 시위대에 가담하면서 군부의 장군들은 이들의 총구가 자신에게 향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군부도 마차도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미국 또한 군부의 편에 섰다. 결국 마차도는 물러났다. 

하지만 사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마차도 퇴진 뒤에 갈 곳 없는 권력을 몇몇 장군들이 좌지우지했고 이에 시민들은 또 거리로 몰려 나왔다. 군인들은 다시 시위대를 진압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감옥으로 갔다. 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혼란에 질린 민중과 일부 군인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사태를 수습할 역량을 갖출 사람을 갈망했다.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였다.

쿠바 동부의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흰색이 아닌 구리빛의 피부를 지닌 인디오의 후예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이끌던 부대의 병사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 마차도 정권 하에서 시위대를 진압할 때에도 그는 이런 그의 장점을 십분 활용, 다른 지휘관들이 보일 수 없었던 융통성 있는 대처로 민중과 와 군부 양쪽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바티스타는 군과 민중을 아우르는 끈끈한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1933년 9월 4일, 바티스타는 마침내 휘하 병영의 부대를 이끌고 혁명을 선언한다. 이에 주요 군 기지의 '유색인종 병사들'이 호응, 흰 피부의 장교들을 체포하고 바티스타의 혁명군에 연이어 가담했다. 거의 대부분의 군대를 큰 피해 없이 장악한 바티스타는 시위대의 주요 리더들과 접촉, 마이애미로 추방된 라몬 그라우(Ramon Grau)를 데려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자신을 그들의 수호자로 천명했다. 그리고 동년 10월 2일, 호텔 나시오날(Hotel Nacional)에서 농성하던 400여명의 반대파 군인들을 2천여명의 병력으로 진압, 바티스타는 마침내 마차도 독재 정권 이래 끊임없이 이어지던 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까지 보면 이 사람도 민중의 편에서 독재 정권을 타도한 훌륭한 혁명가의 어쩌다가 최종 보스로 흑화(黑化)했을까? 뭐, 이 박물관을 다 둘러보다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관내 기념품점을 심드렁하게 지나쳐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덧글

  • 이글루스 알리미 2019/03/05 08:20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03월 05일 줌(http://zum.com) 메인의 [허브줌 여행]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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