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Cuba),1일차:Havana,쿠바 혁명가 열전_2부 - 쿠바(Cuba)


 혁명 박물관을 관람하는 중, 바깥에는 소나기가 왔었다. 12월의 쿠바는 건기(乾期)라고 들었지만 그래도 소나기는 오는가 보다. 창으로 보이는 비 오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비를 피해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고 그 중에는 이 건물로 피를 피해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박물관 어느 층에서 마주쳤던 남녀 학생들도 그런 사람들 중 일부였을까. 

구리빛 피부와 육감적인 몸매, 곧게 솟은 코와 갖은 보석 빛깔로 빛나는 그들의 눈은 이미 다 자란 성인으로 착각할 만 했지만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교복과 투닥투닥 서로 치고 받는 모습은 앳된 소년 소녀의 그것이었다. 그 중 한 소녀가 약간 멋쩍어하는 남학생을 툭툭 건드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백꽃>의 점순이구나. 허허. 

그 나이에 '이 사람'도 아버지나 연인의 사랑을 받았으면 역사가 바뀌었을까. 하트가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듯한 젊은 학생들 뒤로 한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으니 그 그림의 주인공이 쿠바 하면 떠오르는 그 사람, 바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이다.



4. 돈키호테,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원래 이름은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소(Fidel Alejandro Castro Ruz).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 길고 긴 이름보다 간단하게 '피델 카스트로'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의 아버지 앙헬 카스트로는 스페인 출신의 농장주로 피델은 그와 그의 요리사 사이에서 태어난 '뜻하지 않던' 자식이었다. 이후 본처와 이혼하고 앙헬은 피델의 어머니와 재혼했지만 어린 시절을 농장 일꾼들 사이에서 먹고 잤던 피델과 그의 동생 라울은 지주였던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결국 앙헬은 자신의 아들을 가정교사에게 맡겨 교육을 핑계로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도시로 보내버린다. 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피델은 변호사가 되었고 이후 도미니카 공화국의 혁명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등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게 된다.


그 즈음, 쿠바의 정국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차도 정권을 몰아내고 대통령직에 오른 라몬 그라우(Ramon Grau)는 대대적인 사회개혁을 단행한다. 100여 일이 채 되지 않아 여성의 투표권이 개선되고 1일 근로 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 하는 등 노동자들의 권한도 크게 개선되었다. 하지만 급진적인 그의 개혁은 기득권층과 군부의 반감을 샀다. 남미에서 공산주의가 발호하는 것을 극히 싫어했던 미국도 다른 지도자를 원했다. 그런 그들의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였다.

돈과 권력에 가까워지면 사람이 변한다고 누가 그랬나. 자본가, 군부의 지지를 확보한 바티스타는 한 때 혁명 동지였던 라몬을 축출하고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세운다. 라몬이 진행했던 사회개혁은 없던 일이 되었고,그 이후의 대통령은 모두 바티스타의 꼭두각시들로 채워졌다. 실권을 장악한 바티스타는 조심스럽게 사회 시스템을 개선(?!)해 나갔고 1940년에는 직접 대통령에 출마, 좌우의 지지를 모두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무렵에 정계에서 은퇴, 마이애미에서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가 은퇴 생활을 계속 했더라면 그에 대한 모두의 평가는 정말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바티스타의 은밀한 사회 개혁으로 쿠바는 '남미에서 가장 민주적인 시스템을 갖춘 나라'가 되었다. 더하여, 금주법으로 술이 고팠던 미국인들이 그야말로 물 밀듯이 쿠바로 몰려오면서, 쿠바의 관광업과 주류 생산업 - 이라고 쓰고 밀수라고 읽는다 - 이 크게 발달, 경제가 크게 성장한다. 허밍웨이도 이때 쿠바에 왔었고, 쿠바의 바카디 럼(Barcadi Rum)과 럼과 콜라와 섞어 만든 칵테일 쿠바 리브레(The Cuba Libre)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쿠바는 말 그대로 '천국'이었다.

하지만 부를 쫓아 들어온 호텔, 카지노에 미국의 마피아가 개입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쿠바의 정권과 결탁했다. 천국은 '마피아의 천국(Gangster's Paradise)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축적된 부가 공정하게 분배, 사용되지 않으면서 농민, 노동자, 도시 빈민들의 삶은 오히려 어려워졌다.

1952년,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던 이 때, 은퇴했던 바티스타는 돌연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그는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과거와 달리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부정부패 일소를 약속한 야당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자신의 승리가 불투명한 것을 안 바티스타는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기로 마음 먹었다. 선거 3개월 전, 그는 자신의 입김이 닿아있던 군대를 장악, 쿠데타를 일으킨다. 마피아의 수장이 장관에 임명되었고 언론, 사회 통제를 위해 경찰 조직이 거대화 되었다. 거의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민주적인 절차는 무시되었다. 인민의 아들 바티스타는 독재자가 되었다. 쿠바는 마피아와 거대한 공권력이 지배하는 경찰국가가 되었다.

이때가 바로 젊은 피델 카스트로가 인권 변호사로 일하던 시기였다.

열정적이고 무모했던 카스트로는 대담하게도 바티스타의 쿠데타가 불법이라고 법원에 고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그의 고소를 아무런 이유없이 각하했고, 법으로 바티스타의 독재를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카스트로는 무장 혁명이라는 과격한 방법을 택한다.

1953년 7월26일, 카스트로는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에 있는 몬카다(Moncada)병영을 급습한다. 쿠바에서 두번째로 큰 군 시설인 몬카다에는 다량의 무기와 탄약이 있었고 카스트로는 이 무기와 탄약을 탈취한 뒤 혁명군의 세를 불린다는 생각을 했다. 사전 계획은 그럴 듯해 보였다. 이날 산티아고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병영의 군인들도 축제 분위기에 취해 술에 취해있거나 경계를 소홀히 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군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주변 병원에서 일부 혁명군이 소동을 벌이는 동안 병영 반대편에서 주공(主功)이 기습, 부대를 점령한다는 양동도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막상 총성이 울렸을 때 현실은 그들의 예상과 정 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축제와 양동, 기습에도 불구하고 병영의 군인들은 혁명군의 공격에 맞서 즉시 경보 사이렌을 울리고 반격에 나섰다. 100여명의 혁명군은 군 병력에 비해 지극히 열세였으며 무기와 탄약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스트로와 그의 동료들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55명이 처형되었고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을 위시한 소수만 체포되었다. 

그해 10월, 그의 첫번째 공판이 열리고 그는 이 자리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La historia me absolverá)'는 문장으로 유명한 역사에 남을 연설을 한다. 그리고 온 쿠바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 명성으로 인한 여론 때문인지, 바티스타 정권의 고위층에 있던 카스트로의 장인 덕분인지 그는 사형이 아닌 15년 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다. 그리고 겨우 2년 뒤에 사면으로 석방된다. 이 사면과 관련하여, 감옥에서 그를 죽이기가 곤란했던 바티스타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사면을 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즉시 동지들과 함께 멕시코로 도주한다. 그리고 그는 멕시코에서 쿠바 혁명군 - 한 줌도 되지 않는 소수이지만 - 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의 명성을 듣고 혁명의 추종자들이 하나 둘 멕시코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바티스타 정권에서 쫓겨난 쿠바인들 이었지만 전혀 다른 국적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이유로 카스트로를 찾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젊은 의사, 어네스토 게바라(Ernesto Guevara), 일명 체 게바라(Che Guevara)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만남이야말로 혁명의 최강 콤비가 탄생한, 유비와 제갈량의 회동에 버금가는 역사적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5. 혁명의 아이콘, 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학생들의 까르륵 웃음소리에 문득 바깥 창문을 내다보니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박물관을 살펴본 아내는 매우 지겨워하고 있었다. 100% 이해한다. 흥미로운 전시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의 관람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낡은 사진과 군복, 무기들이 역사에 관심이 없는 일반 관광객들에게 그렇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당연하지. 아내는 이제 그만 나가자고 했고 그녀를 따라 천천히 관람실을 나가는 나의 시선에 낡은 라디오 하나가 들어왔다.

진공관으로 작동하는 이 구식 라디오가 혁명군의 결전 병기가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956년까지 카스트로는 미국과 멕시코를 오가면서 혁명군을 훈련 시키고 마침내 자신의 군대(?)를 쿠바로 실어갈 보트를 살 정도의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보트에 그란마(Granma) - 할머니 - 라는 이름을 붙이고 동년 11월25일 드디어 그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다시 한번 혁명을 위해 쿠바로 떠났다. 

하지만 또 모든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82명의 혁명군과 무기로 거의 가라앉을 지경이었던 그란마는 폭풍에 시달리다. 예정보다 2일이나 늦게 쿠바에 도착했다. 시간이 어긋난 이유로 쿠바 내의 저항군과 접선할 수 없었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바티스타의 군대. 자신의 도착으로 쿠바 각지의 호응을 기대했던 카스트로는 자신이 쿠바로 갈 것임을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녔고 바티스타는 주요 상륙지점에 미리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곧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란마의 혁명군은 항해하는 내내 배멀리에 시달렸으며 식량과 물이 바닥나 굶주린 채로 쿠바에 상륙했었다. 반면 바티스타의 정예군은 잘 훈련되었었고, 기관총과 항공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혁명군 중 몇 명이 살아남아 쿠바의 산 중으로 도망갈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정확하지 않지만 82명 중 최소 50 여명 이상이 사망했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피델과 라울, 군의관 신분으로 참가했던 체를 위시한 지휘부는 바티스타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쿠바의 깊은 산속, 정글까지는 바티스타의 군대가 쫓아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혁명군 중 누가 죽고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바티스타는 '피델은 죽고 혁명군은 전멸했다.'고 전국에 공표했었다. 때문에 1957년 2월, 뉴욕 타임즈의 기자와 접선한 혁명군이 신문을 통해 '피델은 죽지 않았고 우리는 정당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싸울 것'임을 천명했을때, 마치 죽음에서 부활한 것처럼 피델은 미국과 쿠바에서 전설적인 혁명 영웅으로 급 부상했다. 그리고 피델은 이 명성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쿠바의 국부 호세 마르티의 동상을 세운 정글의 병영을 뉴욕 타임즈 기자에게 공개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은 미국의 친구라고 어필했다. 하지만 쿠바 사람들에게는 미국은 과거 스페인 제국과 똑같은 나라라고 비판했고, 바로 자기가 호세 마르티처럼 미국과 그의 꼭두각시인 바티스타를 쿠바에서 몰아낼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미디어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 지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미디어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는 체 게바라가 있었다.

게바라는 라디오 레벨데(Radio Rebelde)라는 사설 라디오국을 혁명군 기지에 세우고 쿠바 전역으로 혁명의 정당성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바티스타의 언론 통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던 쿠바 국민들은 체 게바라의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인간적이고, 진솔하고, 더불어 잘생기기까지 한 체(Che)의 목소리에 감화되어 갔다.

사람들이 산으로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 숫자도 한 달에 한 두명에서 백여명으로 늘어났다. 1958년, 충분히 병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한 혁명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2만 명의 바티스타 병력이 반격에 나섰고 혁명군은 후퇴했다. 하지만 체는 라디오를 통해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고 방송했다. 그리고 쿠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혁명군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더 늘어났고, 그 결과 혁명군은 실제로 이기기 시작했다. 그 사실은 또 방송으로 알려졌다. 다시 혁명군에 가담하는 사람을 더 늘어났다...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는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를 점령한다. 그리고 씨엔푸에고스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또 다른 군세는 수도 하바나(Havana)로 향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피델의 혁명군은 천 명도 되지 않았고 바티스타의 군대는 하바나에만 1만5천 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티스타의 군대는 싸우기를 거부했다. 300여명의 하바나 점령군이 도시로 들어오던 그 날, 바티스타는 그의 가족과 친구와 함께 3억 달러의 미화 현금을 소지한 채로 산토도밍고로 도망갔다. 

그 뒤 어떻게 쿠바가 공산국가가 되었고 어떻게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 또 다른 혁명에 뛰어들게 되었는지는 그 언젠가 내가 볼리비아를 여행하는 때가 올 때 이야기 하도록 하자. 쿠바의 혁명은 끝났다.

...그리고 아내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지.

어서 빨리 다른 박물관을 보고 싶었던 아내는 나를 재촉해서 박물관 바깥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온 뒤에야 알았다. 우리가 둘러본 박물관 뒷마당으로 또 다른 전시관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전시관에 바로 보트 그란마(Granma)가 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미 나와버린 우리는 박물관에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그저 울타리 바깥에 서서 야외 전시물만 볼 수 밖에.

혁명군이 수도 점령 시에 사용하기 위해 농장의 트렉터를 개조해서 만든 보병 전투차. 실제 전투에서 사용되기 전에 혁명은 끝나버렸다.

산티아고 공략시에 혁명군을 몰래 실어 날랐던 배달차.

그 외 소련에서 제공한 탱크나 미군 정찰기를 격추한 지대공 미사일 등이 있었으나...그란마호를 보지 못한 나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콜렉션들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이때가 가장 아내가 원망스러웠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혁명박물관 바로 뒤에 위치한 쿠바 국립 미술관(National Museum of Fine Art)로 향하고 있었고, 신나게 걸어가는 그 모습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그 뒤를 쫓아갔다. 뭐, 할머니호는 다음번에 또 오면 보는 걸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덧글

  • 좀좀이 2019/02/23 11:45 # 삭제 답글

    혁명군이 수도 점령시 사용하기 위해 트랙터 개조해 만든 보병 전투차 모양 참 신기해요. 왠지 균형 잘 못 잡게 생겼는데요 ㅋㅋ 그나저나 제일 중요한 그란마호 못 보셔서 매우 아쉬우셨겠어요;;
  • Oldchef 2019/02/24 05:38 #

    네...정말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또 가볼 기회가...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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