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Cuba),2일차:Havana,말레콘, 군인 그리고 환전 - 쿠바(Cuba)


 이날도 일찍 일어나버렸다. 이러지 않았는데. 삐걱거리는 침대에서도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좁디좁은 비행기의 좌석에서도 나는 잘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언제나, 옅은 향 냄새처럼 내 안에는 아직 피로함이 떠돌고 있겄만 나의 눈은 야속하게 열려버린다. 창 밖으로는 아침 해나 혹은 아직 다 떨어지지 못한 달이 나를 보고 서글프게 웃는 듯 하다. 마흔. 나는 점점 늙어간다.

 내가 일어난 풀에 잠에서 잠깐 깬 아내는 인터넷 카드를 사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가게의 오픈 시간이 아홉시 반이었던가. 내가 일어난 시간은 아직 일곱시 반. 나는 남은 두 시간 동안 천천히 샤워를 하고 꼼꼼히 소지품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남는 시간은 산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1. 말레콘(Malecon)

난 1박2일도 보지 않고 분노의 질주도 보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이 장소가 방송이나 영화에 나온 곳이라고 해 봤자 아무런 감흥이 없다. 게다가 청결과 정리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나에게 아무리 이 곳이 하바나를 대표하는 '이쁜 해안'이라고 이야기 해 봤자, 제대로 청소도 안된 보도를 지나 매연을 뿜으며 질주하는 차 사이를 겨우 피해 도착한, 거의 다 무너져갈 것 같은 건물 앞에 펼쳐진 바다 풍경이 좋게 보이겠는가. 


다만 오직 아름다운 것들은 사람들 뿐. 어떤 물을 먹고 자랐는지 알 수 없는 고기를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어가면서 잡는지. 저걸 가져가서 어떻게 먹을지가 먼저 걱정인 소심한 이 여행객과 달리 그들은 노래하고 떠들고 행복해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 저녁 노을이 지고 하늘이 좀 더 맑고 그들이 파나마 모자라도 쓰고 있으면 더 멋졌을 것인데. 나는 바다가 아닌 그 사람들을 한참 바라보다 여기저기를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2. 젊은 군인

 숙소 길 건너의 큰 호텔과 스페인 대사관 사이에는 작은 박스같은 통신사 판매부스가 있다. 그 곳에서 어떤 업무를 처리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필요한 인터넷 카드 - Wifi card지만 내 맘대로 인터넷 카드라고 하겠다 - 를 그곳에서 파는 것은 알고 있지. 사실 어제 저녁에 살까 싶었는데 그 앞에 늘어선 줄이 너무 길어서 이날 아침에 일찌감치 가서 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지.

30분이나 먼저 도착한 그 박스 앞에 녹색 군복의 색이 선명한 한 군인이 서 있었다. 딱 봐도 상당히 어려 보이는 그 젊은 친구는 자신의 상의 앞 주머니에 핸드폰을 꽂아 두고 있었다. 굳이 왜 그런 것이 눈에 들어왔냐면, 그 친구의 핸드폰에서 꽤나 큰 소리로 아침 공기에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빰빠가빠가빰빰 차카차카 빰빠가빠가 빰빰. 뭐 이런 느낌이었나. 그 현란하고 싼티나는 음악은 군복과 건장한 체격에서 느껴져야 할 위엄과 듬직함을 몽땅 집어 삼키고 이 젊은 친구를 옆집의 철없는 고등학생 같은 오라로 덧칠하고 있었다. 친근하게 느껴져서 좋기는 한데, 그 음악을 30분 동안 같이 듣고 있기에는 너무 시끄러웠고 취향의 저편에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뒤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건만 그 음악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그 음악을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오로지 나만, 그 음악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여기서 이런 방식으로 외로움을 느낄 줄이야.

이윽고 왠지 짜증 난듯한 부스 직원이 저 멀리에서 걸어오더니 긴 줄의 가운데를 뚫고 박스 뒤쪽의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10분 정도 늦으면 사과 정도는 하라고! 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공산주의 관료제에서 느림은 하나의 미학이겠지. 괜히 피 보기 싫었기에 나는 조용히 있었다. 이윽고 부스 앞의 작은 창문이 열리고 마침내 그 군인은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퍼치던 음악을 끄고 - 하나님 감사합니다. - 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정말, 30초도 못 되어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통신사 종업원에게 면박을 당하고 줄의 제일 뒤로 쫓겨났다. 아마 이때만큼 스페인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쫓겨났는지 너무 궁금했으니까.

망연자실한 군인은 잠깐 멍하니 서 있다 터덜터덜 줄의 제일 뒤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뒤의 나는 30초도 안되어 원하는 카드를 사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돌아가는 도중 저 멀리서 그 음악 소리가 또 들려왔다. 빰빠가빠가빰빰 차카차카 빰빠가빠가 빰빰.



3. Hostal Peregrino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숙소에는 진한 햇볕이 에스프레소 마냥 직원과 손님들을 깨우고 있었다.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하는 사람들. 무언지 알 수 없는 서류를 정리하느라 분주한 지배인. 청소를 하고 손님들에게 안내를 하는 직원들 등등. 바쁘게 돌아가는 여행자 숙소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설레이게 한다. 내가 그 흐름의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마다 나는 내가 여행 중임을 다시 실감한다.

내일, 우리는 이 곳을 떠나 트리니다드(Trinidad)로 향한다. 하지만 이 숙소에서의 시간이 나쁘지 않았기에 나와 아내는 여행의 마지막이 될 하바나의 하루를 또 이곳에서 머물기로 선택했다. 그리고 트리니나드로 향할 택시도 이 숙소의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우리의 생각을 밝히자 지배인은 기분 좋게 웃으며 추가 숙박과 택시 예약과 관련한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동안 나와 아내는 천천히 숙소 내부의 사진을 찍었다.

나무로 만든 아프리카 - 의 것으로 추정되는 - 공예품과 하바나의 흑백 사진들. 내 취향이다.

체크인, 체크 아웃 동안 손님들이 앉아서 기다리는 대기석(?). 여기저기 보이는 찰리채플린의 영화사진과 피규어에서 주인장의 취향을 약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윽고 서류가 다 준비되었고 돈을 미리 지불하고 서명 또 서명. 영수표를 받고 있자니 아침 식사가 다 준비 된 듯 하다.

어제와 비슷한 느낌의 아침 식사. 과일은 신선했으나 뭘로 만들었는지 알기 어려운 소시지. 그리고 보온병의 커피. 하지만 역시나 맛있는 스팸. 나는 즐겁게, 아내는 약간은 괴롭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바깥으로 나섰다. 아 정말, 이 식사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이 숙소는 80점 이상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구나 아쉬워.



4. Today's

레스토랑에서 무얼 먹을 지 알 수 없을 때 나는 으레 '오늘의 ~' 시리즈를 선택하곤 한다. 오늘의 커피, 오늘의 스프, 오늘의 샐러드...'오늘의' 시리즈는 책임을 전가 할 수 있어서 좋다.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에 맡긴다는 것은 신뢰를 상징하기도 하겠지만 과다한 관계와 정보에 치인 현대인 - 혹은 나 - 에게 있어서 '나는 더 이상 고민하고 선택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포기 선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긍정적인 포기. 그리고 가끔은 필요한 포기. 우리는 더 이상 선택하고 싶지 않아.

여행지에서는 모든 것을 '오늘의' 시리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냥 발 닫는 대로, 눈 가는 대로 간 뒤 모든 책임은 여행지의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것이지. 혹은 여행지의 '덕분'으로 돌려버리거나.

오늘의 날씨는 내가 지금까지 하바나에서 보낸 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이봐 겨우 2일 있었다고)

맑은 날씨 때문 인지 아니면 토요일이기 때문인지 오늘 이 거리에는 예술가들이 가득했다. 캔 따개로 만든 가방에서 낡은 커피 포대로 만든 가방까지. 물감으로 그린 온 갖 그림에서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골동품까지. 그 사이로 아이들이 축구공을 차면서 놀고 옆 벤치에는 노인들이 앉아 체스를 둔다. 그림 같은 풍경. 그러고 우리에게는 어제 보다 만 국립 미술관 제2건물의 표가 있었지.

하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돈을 바꿔야 한다는 것. 

생각보다 씀씀이가 커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 공항에서 바꾼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트리니다드에서 돈 바꾸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으니 그래도 수도인 하바나에서 환전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시작이 문제였다. 그냥 모든 돈을 공항에서 바꾸고 왔어야 했다는 것이지.



5. 환전

구글맵으로 환전할 수 있는 곳, 즉 환전소를 찾아간 우리는 그곳에 늘어선 줄을 보고 기암을 했다. 무슨 놈의 줄이 이렇게 긴건가. 게다가 그 와중에도 시시각각, 누군가는 택시를 타고, 누군가는 버스를 타고, 어떤 이는 걸어서, 어떤 이는 스쿠터를 타고 환전소로 모여들고 있었다. 나도 황급히 줄을 섰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1시간 안에 끝날 줄이 아니었다. 게다가, 소위 환전소라고 불리는 장소는 정말 떡볶이 파는 노점 리어카 두 개 정도의 크기로, 몰려드는 인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은행 강도라도 있는 모양인지 알 수 없지만 안에서 문을 잠그고(?!) 한 명씩만 들여보내 돈을 바꿔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창구는 3개에 직원도 4명이나 있는 주제에 말이다! 좋은 날씨 덕에 기온은 점점 올라가고 있었고 이 상황에 아내를 내버려두면 아마도 곧 폭발하겠지. 나는 아내에게 아침에 산 인터넷 카드를 쥐어주고 어디 공공 인터넷이 되는 장소에서 앉아 있으라고 보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돈을 바꾸기 위해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내 앞의 러시아 커플은 서로 싸워 댔고, 내 뒤의 브라질 여자에게는 환전 암상인이 접근해서 돈을 바꾸라고 추근거렸다. 그리고 경찰 사이렌이 울리고 순찰차가 도착하자 와 하고 여기저기있던 암상인들이 각자의 수단으로 도망갔다. 애초에 경찰은 그 사람들을 잡을 생각은 없었는지 주변을 정리하고 또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러자 또 암상인들이 다가오고...무질서 무질서 혼돈 혼돈.

...무질서와 불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독일인들은 기꺼이 불의를 선택한다...고 어디서 그랬던가. 이 꼴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들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지. 암암.

어느덧 시간은 1시간 하고도 20여분이 지났고 나는 에어콘이 잘 돌아가는 환전소에서 무사히 돈을 바꿀 수 있었다. 망할. 오전 내내 이 햇살을 즐겨야 하는데 여기서 이미 다 지쳐버리다니. 나는 인터넷을 하고 있을 아내를 찾아 터덜터덜 거리로 나섰다. 앞으로 돈은 무조건 공항에서 다 바꿔 다니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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