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Cuba),Epilogue:Nothing gonna change - 쿠바(Cuba)




1.
 
...이미 저녁 아홉 시가 되었지만 하늘에는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아니, 이 정도의 해가 딱 좋지. 황금색, 주황색, 노란색으로 사그라지는 그 아름다운 노을을 멍하니 보며, 나는 포치의 안락의자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내 무릎 위에는 쿠바에서 산 시가 박스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는 박스를 열어 시가를 하나 꺼내어 코 끝에 가져다 대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담배와 꿀이 섞인 그윽한 향기가 숨을 따라 코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마치, 성냥개비 소녀가 추위에 못 이겨 성냥을 그었을 때에 떠올랐던 그 광경처럼, 시가향을 맡을 때 마다 깜빡깜빡, 하바나와 트리니다드, 시엔푸에고스에서 보냈던 즐거웠던 추억이 등대 불빛 마냥 내 머릿속에 다가왔다 멀어졌다. 

그 멀어지는 추억을 붙잡아 보려고, 나는 불현듯 성냥을 꺼내 시가에 불을 붙였다. 화악, 하는 소리가 지나고 보라빛 연기가 시가에서 피어오르자, 램프의 지니가 마술이라도 부린 듯 저 멀리 떨어진 쿠바의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저 멀리 '관타나 메라'가 들려오고 집 앞의 작은 도로로 번쩍이는 바퀴와 다채로운 색깔이 인상적이었던 쿠바의 올드카들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체 게바라 처럼 시가를 입의 한쪽 끝에 밀어 물고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이 시가가 다 타면 이 광경도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럼 어떤가. 또 한 대 태우지 뭐.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과 만족감이 내 몸을 채우고 나는 눈을 감고 그 여운을 즐겼다...

...

아마 이런 광경이 내가 쿠바 여행을 통해 얻고자 했던 보상(?) 이었을 것이다. 힘들 때 마다 꺼내먹고 다시 기분을 북돋을 수 있는 '여행 사탕' 중, 쿠바는 멕시코에 이어 또 다른 카리브의 맛을 내게 보장할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2.
 
 마지막 날 새벽, 공항 행 택시는 매연이 심했고 좌석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예상했던 터였다. 공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벽이니까. 정말 돈 주고 사 먹기 싫었던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가게와 싸구려 커피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 하나 빼고는 죄다 문을 닫았었다. 심지어 인터넷 카드를 파는 곳도 문을 닫았더라. 새벽이니까. 공항직원들의 복지에 나는 공산주의 만세를 외치고 싶었지만 그로 인해 아무것도 사지 못한 불편함은 누구에게 하소연 해야하나.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기다리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 제2의 고향 할리팩스는 흐렸고, 추웠다. 곧 눈이나 비가 올것 같았고, 우리는 피곤했다. 돌아온 행랑을 다 풀지도 못하고 나와 아내는 샤워만 하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고 그런 우리 둘 사이에 '이번 여행 정말 좋았지?' 같은 여흥은 없었다. 피곤했던 우리는 그렇게 곯아떨어졌다.

예상과 다른 맛. 원하지 않았던 조합. 처음으로 페퍼민트 초코렛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 느꼈던 그 불쾌함. 치약맛과 단맛이라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눈앞에는 집에 도착하니 경첩이 떨어져 덜렁거렸던 불량(?) 시가 박스가 멋쩍은 모습으로 놓여 있다. 강력 접착제로 다시 뚜껑을 붙여 놓은 그 놈은 상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나 언제 또 반대쪽 경첩이 떨어질까 불안하다. 박스 안의 시가를 들어보니 몇 개는 말라서 부스스 담배 잎이 바닥에 떨어진다. 몇 번이고 냄새를 맡아 봐도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당연하지. 대당 몇 불짜리 싸구려 시가인데. 그래도 좀 비쌌던 시가에서는 희미하게 담배 향기가 나긴 하지만, 얼마나 오래갈지. 나는 가볍게 한 숨을 내 쉬고 시가를 내려 놓고 싸구려 우리 아파트 창문으로 바깥을 보았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그 아래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비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릉우릉 창이 울었다. 나는 '집'에 살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포치도 없다. 뜰도 없다.

현실은 이러하다. 더하여, 쿠바에서 나는 얻고자 했던 것을 얻지 못했다.



3.

 영생을 얻기 위해 떠났던 길가메쉬는 영생을 얻지 못했다. 집을 찾아 나섰던 오딧세우스도 집에 도착했기는 했지만 꽤나 오래 걸렸고 고생도 했다. 자기 성격 탓에, 다른 놈들의 회방에, 동료의 바보짓 등등으로. 그럼 그들의 여행은 실패한 것인가.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다. 애초에, 실패한 여행이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누구처럼 중국 공항에서 추방당한 들, 누구처럼 보고타에서 카메라와 노트북을 몽땅 도둑 맞은 들, 아내처럼 싱가폴에서 여권을 잃어 버린 들, 어찌되었든 그건 실패한 여행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우리는 '사탕'을 얻을 수 있다. 다만 그 맛이 내가 원했던 맛이 아닐 뿐이지.

쿠바의 사탕은 '내려놓음'의 사탕이랄까. 나의 지랄 맞은 성격을 좀 더 내려 놓으면 네 맘에 안드는 곳도 즐거울 수 있다는 그런 맛이라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포기하고 - 혹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 다들 사람 사는 곳인데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지.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다음 번에 쿠바를 간다면, 혹은 다른 곳에 간다면 나의 그런 성격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렇게 현명(?)하지 않고 나는 더욱 미련하다. 부탄이든 카불이든, 아마 나는 똑같이 투덜거릴 것이고 여전히 경악할 것이다. 나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더욱이, 내가 바뀌려고 여행을 가는가?

이번 여행에서 하나 깨닫게 된 것은, 나는 '이런' 나라도 환영받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그냥 있는 이 모습대로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을 찾아 - 혹은 그런 곳이 존재하는지 알기 위해 - 여행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모든 낯선자에게 편한 곳이 아니라 '내'가 편한 곳. 몇 달 동안 백수 짓을 해도, 때로는 새벽까지 게임을 해도, 이 나이가 먹도록 아기도 없고, 국가와 사회가 나 같은 사람에게 바라는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하고 - 혹은 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 살아가는, 현재 생산력과 사회 기여도가 한없이 0에 수렴하는 나 같은 인간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런 생떼가, 나는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을 테니 그래도 사랑해줘라고 외치는 아기의 짜증 같은 것이 나의 여행이란 것이다. 그럴지도.

그래서 여행을 다녀와도 나는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응당 바뀌어야 할 곳은 세상(!)이기 때문에. 아, 이 제멋대로의 쾌감이여. 그래서 나는 또 짜증 내고 또 투덜거리고 또 감격하고 또 행복하기 위해 여행을 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에서 얻은 사탕은 참으로 희귀한 맛을 가지고 있다. 어찌 되었든 내가 내려놓아 보았으니. 그렇게 해 봤다는 것 자체는 나에게 있어 큰 의미가 있다. 나 같은 고집 돌덩이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니. 내가 자발적으로 포장지를 벗겨 입에 밀어 넣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닥친다면 - 여행이 아니라 사업이나 또 다른 삶의 과정 중에서 - 나는 이 사탕의 맛을 떠올릴 것이다. 그래, 이것도 먹어봤었지. 그때 내 귓가에 관타나메라가 들리고 코 끝에 매연과 함께 시가 냄새가 흐르고 입안에 짜릿하게 칵테일의 맛이 떠오른다면, 나는 그 황당한 상황을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쿠바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그 새하얀 백사장 위에 펼쳐지는 사파이어 색의 바다와 하늘을 더 자주 떠올렸으면 싶지만 인생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PS. 지금 나는 페퍼민트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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