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EI),Charlottetown - 동부캐나다(AtlanticCanada)




1.

 그 여름날, 아내의 취업이 확정되었다.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는 더 이상 쉽게 여행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슬픈 소식이다. - 물론 한국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우리는 아직 매우 자유롭다. - 그래서 이 자유로운 일상이 끝나기 전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이럴 때를 위해 나에게는 아껴 둔 여행지가 있었다. Prince Edward Island. 통칭 PEI. 제주도의 4배에 달하는 거대한 섬. 그 이름만 떠 올려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빨간머리 앤의 고향. 그리고 집에서 겨우(?) 3시간 40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 아내는 지난 여름 나를 버리고(?!) 학교 동료들과 같이 이 곳에 다녀왔었다. 버스로 떠났던 그녀는 가는 길만 대략 5시간이 걸렸고 그 때문에 제법 고생을 했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었지.

 지금은 우리에게는 작지만 차가 있다. 그냥 가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아내도 운전을 한다. 나는 그녀에게 핸들을 넘기고 조수석 창문을 활짝 열고 햇살과 바람을 가르며 드라이브를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갈 때 만큼은. 돈도 아낌없이 쓰기로 했다. 9월에 오시는 장모님을 위해 그때 같이 식사도 하고 잠도 주무실 곳을 미리 알아두고 싶었다...는 핑계로 말이지.  나도 이제는 좀 편한 여행을 가고 싶은가 보다. 점점 늙어가나 보다. 조금 더 슬픈 것은 이제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

아무튼,

모든 것이 다 좋으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여행 가능한 시간이 주말, 딱 2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PEI를 다 돌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는 딱 두 곳만 집중 공략하기로 했다. 샬럿타운(Charlottetown)과 빨간머리 앤의 농가를 그대로 꾸며 놓았다는 캐번디시(Cavendish)의 Green Gables Heritage Place. 사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PEI 여행이라고 붙이는 것이 조금 멋쩍기도 하다.

 고르고 골라 선택한 날 맑은 주말, 나는 아내가 타는 차를 타고 PEI로 향했다. 노바스코샤에서 뉴브런즈윅을 지나 길고 긴 다리를 건너 PEI로 들어서는 드라이브 코스는 정말...아름다웠다. 가는 동안 Queen과 Maroon5 그리고 어린 시절 여름을 같이 보냈던 쿨과 터보의 노래가 끊임없이 카스테레오에서 흘러 나왔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시원한 바람, 주황색의 비옥한 땅이 끝도 없이 길 옆으로 펼쳐지는 중에 가끔 드문드문 소와 말, 그리고 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캐나다의 시골 풍경. 하지만 그 장면은 지겹지 않고 마냥 여유로웠다. 우리는 그저 달리고, 또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우리에게는 도달해야 하고 돌아가야 할 장소와 시간이 있다. 행복하지만 조금은 답답한 현실. 그러기에 이 주말 여행이 더 소중한 것이다. 아니, 사실 모든 주말 여행이 다 소중한 것이다.



2. Charlottetown

 점심때를 좀 지나서 우리는 샤롯타운에 도착했다. PEI의 주도(州都)라고 들었기에 뭔가 크고 으리으리한 '도시'틱한 분위기를 생각했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작고 귀여운 마을이 그 사이즈만 커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샤롯타운에는 마치 가정 교육을 잘 받은, 하지만 명랑하고 밝으며 호기심이 넘치는 소녀가 뒷짐을 지고 나의 주변을 서성거리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PEI의 주 산업은 단연 관광업. 그 중심 도시인 샤롯타운에는 맛집과 기념품 가게, 펍, 호텔과 B&B 등 없는 것이 없었다. 운 좋게 시내 중심가에 빈 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우리는 룰루랄라 주차를 하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마을 산책에 나섰다.

 산책의 시작 지점인 다운타운 십자대로 한 쪽 거리에는 PEI의 명물 아이스크림, 카우즈(Cow's)가 있었다. 핑크색 아이스크림이 켜켜이 쌓인 간판과 그 뒤에 순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귀여운 젖소 간판을 내가 어찌 못 보고 지나칠 수 있겠는가? 이곳의 아이스크림은 꽤나 맛있는 편이라 노바스코샤나 뉴브런즈윅의 이런저런 도시에도 분점이 있다고 들었다. 벤쿠버나 토론토에는? 글쎄 잘 모르겠다. 날도 덥고 하니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물고 돌아다녀 볼까 싶었는데. 마나님이 나중에 아이스크림 먹을 곳이 있으니 지금은 그냥 가자고 한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 그녀의 말에 따라 다시 길을 나섰다.

 거리는 깔끔했고 넓었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성수기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라 사람도 적당한 수준이었다. 마음에 드는 거리였다. 나이 먹고 이곳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수많은 거리의 매력 요소 중 가장 맘에 들었던 면은 잘 정돈되고 깔끔하면서도 예술성 또한 갖추고 있는 상점 간판들과 도로 표지판들 이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아둥바둥, 중구난방, 엉망진창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이 서울 거리의 간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여유와 정이 있었다. 물론, 인구가 천만이 넘어가는 대도시와 이름 모를 시골의 큰 섬 마을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될 수도 있겠지만, 도시 촌놈인 나는 이렇게 잘 정리되어 있으면서도 여유 있고 따뜻한 거리가 좋다.   

 예를 들어, '빨간머리 앤 초콜릿' 간판을 보자. 먼저 눈에 확 들어오는 노란색 모자. 크고 강렬한 색상이 멀리서봐도 눈에 잘 들어온다.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은 것은 앤의 뒷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신비로움. 만약 저 간판에 앤의 앞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면 어땠을까. 다음으로 양 갈래 땋은 머리 끝으로 만든 가게 상호의 시작과 끝. 굳이 따로 리본을 만들지 않아도 리본을 그려 넣은 듯한 느낌이 드는 간결하면서도 스마트한 마무리. 정말 좋지 않은가.

다만 이 가게의 초콜릿은 간판만 못하더라.  

 보행자 건널목을 나타내는 표지판. 밍숭맹숭 그냥 걷는 사람보다 이렇게 몬티 파이선의 '얼렁뚱땅 걷기 부서 장관'을 넣어두니 얼마나 재미있는가? 

  이 거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비단 간판 덕분 만은 아니다. 옛 것과 새것의 조화라고 해야 할까, 거리 곳곳에서 눈에 들어오는, 잘 보존되고 꼼꼼히 보수 된 오랜 건물들 또한 이 매력적인 거리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 맘에 들었던 건 바로 이 시청 건물. 건물 한 쪽 구석의 종탑이 지금도 멀쩡하게 서 있는 그 건물 안에서는 이 도시의 공무원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문화재로 박제된 건물이 아니라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살아 있는 건물이라는 것이지. 

 시청 옆에는 소방서가 있었고, 그 소방서 앞에는 구식 소방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지금은 장식용에 지나지 않지만 이 소방차는 한 때 이 거리를 요란스러운 종소리와 함께 달렸겠지. 모름지기 소방차는 달리지 않고 건물에서 낮잠이나 자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만, 이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은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불현듯 운전석이나, 하다 못해 뒤의 짐칸에 실려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겨우 그 유혹을 뿌리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두터운 턱이 인상적인, 처칠의 얼굴이 떡 하니 붙어 있는 펍, 처칠. 한 국가의 수장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본국도 아닌 타국의 술집 이름으로 불릴 정도라니. 뭐, 술도 좋아하고 담배 좋아하는 그 선생님의 성격을 생각하면 술집에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긴 한데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국이 아닌 어느 외국의 술집에 '율곡 이이' 같은 이름이 붙어 있다면 느낌이 어떨까. 나는 이상할 것 같은데. 



3. The Roman Catholic Diocese of Charlottetown

 거리를 걷다가 골목 사이로 뾰족하게 올라간 첨탑의 끝 부분이 보여 그리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거리에 잘 어울리는 교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교회를 다녔던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교회가 낯설지 않다. 오히려 여행지 마다 성당이나 교회가 눈에 띄면 챙겨보는 편이다. 물론 절이나 도교 사원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비과학적, 초월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맹신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에 그 어떤 것도 섣불리 믿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섣불리 부정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덕분에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마음 것 갈 수 있다.

아무튼,

이 교회의 구조와 크기, 그리고 외관의 특징과 아름다움은 한눈에도 이 곳이 범상치 않은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뭐가 ㅇ 있나 찾아 봤더니 이름이 좀 다르다? 'The Roman Catholic Diocese of Charlottetown'...Diocese...Diocese? 아하, 여기가 주교가 머물렀던 교구교회 였구나. 문은 반 정도 열려 있었고 지나가던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 중에서도 하나 둘,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조심스럽게, 하지만 마치 빨려 들어가듯 교회 안으로 발 걸음을 옮겼다.

 교회는...놀라울 정도로 조용했고, 웅장했고, 경건했다. 늘어선 사도의 조각들, 성찬대 아래에 부조로 들어있는 최후의 만찬, 그 옛날 처음 부임한 주교가 포교를 위해 만들었다는 썰매이자 수레 등. 그 모든 곳에 들어 있는 정성과 경건함. 그 모든 것들이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의 증거로 볼 수 있으리라. 신앙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으리라. 아니,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두운 실내로 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스테인드글라스의 화사한 색들을 입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쏟아지는 색의 향연이 들어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속에 서 있으면, 평소에는 믿지 않았던 저 먼 초월자의 존재가 마치 내 위에, 혹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흥미로웠던 점은, 이 곳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비단 성경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이 교회에서 사임하셨던, 현생을 살았던 주교들의 이야기들도 전부 들어있었다는 것이었다. 상부 구조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구약, 신약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가운데 그 아래 하부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이곳 사람들과 미사를 행하고 장례를 치르고 재난에 맞서는, 안경을 쓰고 차를 모는 주교들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이유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스테인드글라스 한 장, 한 장을 살펴보다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찬 가슴을 어쩔 줄 모르고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를 서성거리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하늘의 해는 조금씩 저물어 파란색에는 황금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산책을 하는데,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걸으면 지금 내 감정의 틈새로 이 여행에 어울리지 않을 향수와 삶에 대한 감정이 가득 차 오를 것 같았다. 산책 도중에 마주한 중국인 이민자 건물 앞에서 그런 생각은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그 옛날 고향을 등지고 이곳까지 찾아온 중국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니, 지금 나의 편한 일상은 그에 비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어느덧 그들의 감정에 공명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나는 브레이크를 걸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즐겁게 여행하자.

그래서 나는 정처 없이 걸었던 산책을 마무리 짓고 배를 채우기로 했다. 맛있는 술과 달달한 디저트도 곁들여!



4. Gahan House & Truckin' Roll

 이 곳 캐나다에서 나는, 처음 가본 곳에서는 언제나 피쉬앤칩스를 시켜본다. 그 메뉴는 중국집의 짜장면과 탕수육과 같다고 내가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래서 이곳. 샤롯타운의 거리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도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피쉬앤칩스를 시켰다. 물론, 맛있는 맥주와 같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곳 - Gahan House 였지? - 의 피쉬앤칩스는 훌륭했다. 살도 두툼하면서도 속까지 적정한 수준으로 잘 익어있었다. 튀김옷은 바삭하면서도 질기지 않았고, 손수 만든 타르타르 소스와 사우어크라우트도 맛있었다. 더욱이 PEI의 명물 맥주 브랜드, Gahan의 스타우트는 진하면서도 부드러웠고 구수하면서도 달달 했다. 가격은 좀 비쌌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먹고 마시면서 피곤한 다리를 풀고 먹먹해졌던 감정을 달랬다. 지난 여름 캐나다에 왔을 때의 이야기, 그리고 그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서 이렇게 둘 중 하나라도 취직을 할 수 있었는지, 다시 보내왔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때로는 즐겁게 웃었고 때로는 쓴 미소를 지었다. 즐거웠다. 즐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우리는 일단 예약했던 호텔에 들려 체크인을 했다. 아니, 식사하기 전에 체크인을 했던가? 뭐, 중요한 것은 잠깐 호텔에서 쉬고 나온 우리는 황혼이 지는 이 거리에서 디저트를 찾아 헤매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리하여 찾은 곳이 바로 샬롯타운의 명물 아이스크림 트럭, Truckin' Roll이 되겠다.


 사실 여기 이 트럭은 Church St.에 붙어 있는 트럭이니 여기저기 움직이면서 종을 쳐서 아이들을 모으는 그런 아이스크림 트럭과는 많이 다르긴 하다. 그러면 어떤가. 어른 두 명이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의 외관은 의젓한 유럽식 트럭, 그 자체였으니까 말이다.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자기들이 직접 유럽에 가서 이 트럭을 배에 싣고 왔다고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 제공되는 아이스크림은 콘 모양이 아닌 Roll 형태의 아이스크림이다. 남극의 대지 마냥 차가운 금속판에 이런저런 아이스크림 재료를 넣고 뚝딱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낸 뒤에 주걱으로 얇게 펴고, 그 아이스크림 양탄자를 주걱으로 밀어 이렇게 동글동글한 롤을 만들어 낸다. 이전, 한국에서 먹었던 콜XX톤 아이스크림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 아름답게 말린 모양과 그 식감에 있겠다. 이름이 복잡해서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이 말차 아이스크림은 마치 막 피어난 녹차꽃(??) 같았다. 크림도 맛있고 그 위에 뿌려진 고명들도 고소하고, 아이스크림 사이사이에 스며든 말차향과 꿀맛도 정말 괜찮았다. 

 제조공정이 복잡하다보니,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꽤나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고객들을 위해 이 트럭이 준비해둔 것은 피크닉 매트와 젠가 게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도, 연인의 팔짱을 끼고 나온 남녀 커플도 잔디밭에 매트를 펼치고 앉아 젠가를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않고 벌렁 드러누어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모습을 보면서 달달한 자신만의 디저트가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유롭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정말, 여름 휴가다운 시간이었다. 우리도 그 사이에 앉아 그 신선놀음이나 해 볼까 했으나 생각보다 우리의 아이스크림은 빨리 나왔다. 그리고 곧, 그 아이스크림들은 우리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하나 더 시키기에는 너무 많이 기다려야 했기에,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번에는 장모님과 함께 이곳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5.

 나의 아내는 배가 부르면 소화시켜야 한다는, 혹은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 비슷한 것이 있다. 돈과 시간을 들여 올려놓은 만복도를 왜 낮추는지 난 정말 이해가 안되지만, 나이먹으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세상에 목숨걸고 지켜야할 가치와 생각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대로, 바라는대로, 끌고가는대로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로 나아갔다.

너무 많이 봐서 식상할 만한 캐나다의 그림같은 풍경이 또 눈앞에 펼쳐졌다. 진한 오랜지색의 고풍스러운 건물이 바라보는 가운데 해안선과 나무들 사이로 잘 정비된 산책로가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여유가 넘치는 풍경에 경탄하고, 내가 그 가운데 앉아 - 혹은 저 집의 포치에 앉아 - 은퇴생활을 즐길 수 없음에 살짝 질투심이 들기도 했다. 이 나이에 무슨 은퇴냐고. 이 아름다운 풍경을 죽기전에 다 보려면 지금 당장 은퇴해서 돌아다니지 않으면 다 볼 수 없을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한때 이곳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에도 샬롯타운은 PEI에서 손 꼽히는 정치적,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기에 바다가 면한 해안선에 이렇게 요새를 지은 것이겠지. 산책로를 따라 잘 보존되어 있던 포대와 방둑, 탄약고와 작은 병영들이 바로 그러한 샬롯타운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저 대포가 이곳에서 사용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좀 애매한 면이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저 정도의 구색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나와 와이프는 산책로의 끝까지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변 풍경, 내일 여행 계획, 장모님이 오시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놀이터에서 울려오는 음악소리 등등. 해는 이제 많이 기울어 어둠이 드문드문 해안에 펼쳐진 숲 사이로 깃들고 있었다. 시간가는 줄 모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 상황,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이렇게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왜 우리는 집에서는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바로 일상의 저주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러기에 우리는 그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닌지, 나에게 있어 수많은 여행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돈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되는 한, 숨을 쉬고 눈을 뜨고 있는 이 살아 생전에 되도록 많은 곳을 가 봐야 겠다고 마음을 다시 먹었다. 가능하다면 그녀와 함께. 


덧글

  • See 2019/08/22 23:48 # 삭제 답글

    Prince Edward Battery에 있는 대포들은 1800년대부터 있던 진짜배기 인데요.
  • Oldchef 2019/08/23 05:16 #

    네, 제 사진에 올린 다섯 문의 대포 중 우측에 있는 세 문의 대포는 포차의 형태와 제질로 봤을 때 해안이 아닌 선박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곳에서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지 않을까' 라고 언급했습니다. 포신의 지름으로 봤을 때에도 사용했던 포탄의 구경(크기)도 다른 것 같고 말이지요. 말씀하신 대로 저 대포들은 19세기의 양식으로 제작된 대포 - 혹은 그 복원물 - 이라는 점에서는 동의 할 수 있지만 지형과 용도로 판단했을 때는 좌측 두 문의 대포와 우측 세 문의 대포가 다른 타입임에도 불구하고 한 포대에서 운용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전시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른 곳의 대포를 가져다 놓은 것 같습니다만...

    혹시 Prince Edward Battery 에서 용도와 타입이 다른 '진짜배기' 대포가 1800년대 부터 지금까지 전시되었다는 구체적인 사료가 있다면 꼭! 저에게 알려 주세요. 부족한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 Anonymous 2019/08/23 18:06 # 답글

    와 여기 제 버킷리스트에 있는 곳인데 가까우시다니 부럽네요. 한국에서 가려면 에어캐나다 비행기 말고는 답이 없어보입니다 ㅠㅠ 독점답게 할인도 없고..
  • Oldchef 2019/08/29 03:56 #

    하지만 저는 이곳에 사는 덕분에 그동안 편하게 갔던 대만, 일본, 동남아시아의 좋은 여행지와는 멀어졌지 뭡니까. 미국이나 쿠바 여행을 오시면서 겸사겸사 방문하시면 그래도 가능성이 좀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PEI에 가실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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